현재의 삶과 업적

삶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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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경 이사장님 생애사

현재 정희경 선생은 1932년 5월 24일,
함경북도 북청에서 아버지 정인창과 어머니 임병의 사이에
2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습니다.

학문과 예절을 중시하는 가문에서 성장하였고 특히, 어머니 임병의는 엄격하고 생활 지식이 풍부한 교육자적 인물로 자녀들에게 학문뿐만 아니라 바느질, 음식, 살림 같은 실용적인 부분까지
철저히 가르쳤습니다.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여러 차례 이사를 했으며, 이를 통해 폭넓은 시야와 높은 적응력을 키워나갔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교육현장에서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정희경 선생은 유년 시절 일제강점기와 광복이라는 큰 사회적 격동기를 거쳤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6.25 전쟁이 일어났지만, 이러한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정희경 선생은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에 재학 중 부산으로 피난하여 1951년 7월 피난지에서 이화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같은 해 9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이 시기 강원룡 목사를 만나 기독교 신앙생활을 시작하며 기독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신앙과 사회참여의 경험은 정희경 선생의 삶의 방향을 더욱 확고히 다져나가게 하였습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2학년 때
교육학과로 전과하여 졸업한 후

1955년 미 국무성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 캔자스 주립대학교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미국에서 유학하며 새로운 사상과 교육 방식을 접했고, 여성의 사회 진출과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확신을 굳혔습니다. 미국에서 교육심리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1958년 한국으로 귀국하였으며, 귀국 직후에 미국 유학을 가기 전 약혼했던 청강 이연호 선생과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습니다.

이와 동시에 이화여자대학교와 숙명여자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하며 교육자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1959년에는 한국 최초의 아동상담소를 개설하여 아동 심리와 상담 교육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1962년, 서울대학교 학생지도연구소 창설 멤버로 지도교수에 취임했고 1966년 성균관대학교 문리대 부교수 겸 여학생처장으로 재직하며 여성 학생 복지와 권익 향상에 기여하였습니다.

1970년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 최초의 여성 조교수로 임명되며, 여성으로서 한국 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하셨습니다. 또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한국기독학생협의회, YWCA와 같은 기독교 관계 단체에 깊이 관여하며 자신의 기독교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서울대 교수 시절, 모교인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교장직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게 됐습니다

정희경 선생은 처음에는 망설이며 많은 고민을 하였으나 자신의 신앙을 다시 돌아보는 숙고 끝에 주변의 권유와 신뢰 어린 부탁을 받아들여, 1971년 최연소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습니다.

부임 후 정희경 선생은 1982년까지 재직 하며 행정 위주의 교육 개편, 학생 중심의 교육철학 확립, 교사 재교육, 문화·예술 활동 활성화, 학생 자치 활성화, 교내 시설 정비 등 혁신을 이루어 나갔습니다. 세미나, 강연, 집필 등을 통해 교육철학을 전파했으며 교육제도 개선을 위하여 꾸준히 목소리를 냈습니다.

1972년에는 남북적십자회담 여성 대표로 참여하여 통일과 인권 분야에서도 소중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회담은 남북 간 인도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첫 공식 접촉으로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진행되었습니다. 정희경 선생은 회담 현장에서 남북 대표 간 교류를 지원하고 이산가족 상봉 문제와 관련한 부분에 많은 참여를 하였습니다.

또한, 여성 대표단원으로서 북측 여성 인사들과 비공식 대화에도 참여하여 상호 이해 증진에 많은 기여하였습니다.

이화여고 교장으로 11년간의 임기를 마친 후 1985년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부탁으로 현대고등학교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였습니다.

정희경 선생은 전인교육을 강조하며 인지적인 것 뿐만 아니라 인성, 예술, 체육을 아우르는 균형 잡힌 교육을 추구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어머니회와 아버지회를 조직하여 그의 교육철학을 끊임 없이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정희경 선생은 좋은 학교는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행복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학교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열정을 바치며 학교를 이끌어나갔습니다. 이어 1990년에는 계원예술고등학교 제2대 교장을 역임하며 중등교육 현장에서 비전 있는 여성 교육지도자로의 역량을 발휘하였습니다.

1996년 정희경 선생은 제15대 총선에서 전국구 1번으로 당선되어 국회의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국회의원이 된 정희경 선생은 교육의 가장 기본이 되는 유아교육이 우리나라의 교육법에서 빠져 있음을 절감하며 유아교육법을 제정을 추진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우리나라 교육현장의 개선을 위해 사립학교법 개정 참여하여 사학 운영의 투명성과 재정 집행의 공정성을 강화하였습니다.

정희경 선생은 국회의원으로서 단순 발의가 아닌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려고 노력하였으며, 현장 중심, 생활 밀착형 의정활동을 펼쳤습니다. 여성 정치인의 길이 아직 낯설었던 시절 정희경 선생은 여성 정치인의 모범을 보이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정희경 선생은 학교 설립에 관한 뜻을 내비쳤던 남편 청강 이연호 선생과 함께 1993년 학교법인 청강학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학교 설립에 대해 반대를 하였으나 청강 이연호 선생의 조부님 3형제가 장학재단을 헌정하며 교육에의 의지를 세웠던 뜻을 이어나가기 위해 학교 설립을 한다는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대학을 준비하며 그 당시에는 생소하고 새로운 문화산업 분야에 도전하기로 하고 1996년 청강문화산업대학교를 개교하게 되었습니다.
정희경 선생은 청강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남편의 뜻인 학교 발전을 위한 보좌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개교한 해 11월 12일, 평생의 동반자이자 동지였던 청강 이연호 설립자가 별세하는 큰 슬픔을 겪었습니다. 큰 슬픔에도 불구하고 정희경 선생은 제대로 된 교육환경을 갖추고 끝없는 사랑을 학생들에게 주면 지식 기술에 더하여 제대로 된 사람 됨됨이가 길러질 수 있다는 믿음을 교육현장에서 실천해 나갔습니다.

정희경 선생은 1952년 복음을 받아들인 후 평생 동안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 나가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동성교회, 현대교회를 거치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고 여성 장로 장립이 실시되는 첫해 현대교회 첫 여성 장로가 되었습니다. 정희경 선생은 스스로 때로는 힘차게, 때로는 늘어져서 걷기도 하고, 때로는 마지못한 의무감으로 교회를 섬겨왔다고 평가하나, 인생의 기복의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선 늘 지켜보시며 보호해 주셨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이 자신을 늘 세워주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정희경 선생은 사회에 봉사하기 위한 여러 일을 하였습니다. 납북적십자교류위원회 위원장, 재단법인 일가재단 후원회 회장, 북한 어린이 돕기 운영위원장, 한미문화사회발전협의 이사장,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 회장, 한민족 어린이 돕기 네트워크 상임대표, 대한 YMCA 후원회 이사장 등의 활동을 하며 국내 외 나눔과 봉사, 섬김을 실천하였습니다. 그 공로로 2012년 YWCA 창립 90주년 전국회원대회 대상과 제8회 비추미 여성대상을 수상하며, 평생의 헌신이 널리 인정받았 습니다.

평생을 어느 자리에서든 어느 역할에서든 열정을 보이신 정희경 선생은 2024년 10월 5일 향년 92세를 일기로 별세하셨습니다. 정희경 선생은 교육자, 정치인, 종교사회 인, 그리고 가정 속 실천가로서, 네 개의 무대에서 한결같은 진심과 헌신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분의 발자취는 오늘날에도 교육과 사회, 신앙 공동체에서 길이 기억될 것입니다.